둥근 백색광이 검푸른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는다. 근원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색을 태워내며 작렬하는 찰나. 무엇보다도 뜨거울 것만 같던 빛깔의 온도들. 곧 찾아올 어둠이라곤 죄 거짓말이라는 듯이 상냥하고 또 다정히 지평선을 어르는 저녁. 석양이 진다.
의무와 책임 이외에 그들을 묶어 놓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없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결코 도시라고 할 수 없는 해변가의 한 관광촌에서 자라난 소녀는, 도통 바다에서 자라난 사람답지가 않았다.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환상에 젖어본 적도 없었고, 발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차는 축축한 모래알들과 짠 바닷바람이라면 아주 질색팔색을 했다. 사시사철이 강한 뙤약볕에 내리쬐는 환경은 소녀에게 고역일 뿐이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병치레는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었다. 더위를 견디기 어려운 몸에는 한이 다 서려갈 지경. 앞으로도 계속 이런 깡촌에 갇혀, 끝나지 않는 여름을 지독해하며, 이 작달만한 동네 바닥을 온 세상이라고 여기는 얼간이들처럼은 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소녀는 도시에서 온 남자의 말에 그토록 쉽게, 깜박 넘어가고 말게 된다.
이론과 이상으로 단단히 무장된 차림새를 한 채 비로소 학문의 온상지라는 대학에 발을 들인 첫 해, 테이아가 무슨 일을 벌이고 말았는지는 그 대학 안에서 꽤 유명한 얘깃거리다. 주제도 모르는 당돌한 신입생이었다. 작고 촘촘히 짜여있는 사회 속에서 단 한가닥의 길만 어긋나도 모두 뭉텅지어 엉켜버리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혼자가 되는 일은 너무 쉬웠고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인생에 도움 될 사람들이 아니었을 테니까.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런 일 따위는 살면서 수도 없이 벌어진다.
때마침 자신처럼 혼자인 사람이 있었다.
그가 왜 혼자인지, 혼자인 것을 편하게 여기는지, 그에게는 누군가 필요했던 적이 없는지 따위를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다만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 보기 드물게 마음에 쏙 들어왔었다. 번듯한 차림새와 짧고 간결한 의사표현, 주어진 일이라면 묵묵하게도 성실히 임하는 점이나 자신이 지닌 것을 큰 아쉬움 없이 베푸는 자세 ..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막대한 집안 배경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으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정도로 넘길 수 있었다.
세간의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실상 뻔하기 짝이 없는 드라마 속 풍경. 돈이 많은 남자와 자기밖에 모르는 여자. 그런 여자에게 속절없이 휘둘려선 어딜 가든 졸졸 끌려다니는 남자. 누군가 말이라도 붙여보려 사귀는 것이냐 물어보면 대답이 없는 남자. 속된 말로 아싸 둘이 자석처럼 붙어 다니면서도 극구 연애라곤 부인하는 꼴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곤 했다. 여자에게 있어서는 편한 상대였다. 자신을 피해 다니지도 않았고 무얼 부탁하든 (필요 이상으로) 들어주었다. 여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필요했을 때 그 남자는 모든 상대가 되어주었다. 학우, 동행, 친구... 하늘에 맹세컨대 여자는 그를 만만히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제 안으로 들여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것도 정말이지 늦게, 일이 다 벌어지고 난 후에야.
숱한 침범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더는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선을 긋거나 밀쳐내고, 더는 안된다며 도망칠 수도 없었거니와 그럴 마음도 사그라들었다. 두고 달아나버리기에는 너무도 묵중한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도 많은 감정을 열어보인 채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지난 몇 해 간의 세월 중 어느 하루도 그가 녹아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분명 자신이 끌어왔던 관계의 선상 위에서 어느샌가 온몸이 옭아매인 듯하였다. 슬며시 그 진득한 덫의 사위에서 벗어나려 하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끌어와 제 눈앞에 두려는 남자였다.
아스트라 테이아가 지금까지 느껴온 사랑이라는 감정은 거의 동경과 같은 선상에 존재했다. 도시에서 온 첫사랑을 보며 꿈을 키웠고, 잠시나마 연인이었던 남자에게서 존경심을 느꼈다. 똑똑한 사람, 근사한 사람, 내가 되고 싶은 모습.. 두근대는 마음도 설레이는 감정도 딱 거기까지.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알고 있는 이들이 부러웠고 그들이 보고 있는 머언 곳을 함께 바라보고 싶었다. 더욱 높은 곳에 이르르고 싶었다. 사랑이란 것은, 그렇게 손을 맞잡고 위를 향해 오를 사람을 찾는 여정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연인이 자연스레 요구하는 접촉이 내심 탐탁지 않았다. 그보다 더 깊어져 가는 관계 속에서도 회의를 느낄 뿐이었으나 차마 세간의 기준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신은 날 안 좋아하지 ...
사실, 얼마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날 밤의 입맞춤으로 모든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다. 연인도 아닌 남자에게 입술을 열어주고, 방 문을 열어주고, 어떤 상황이나 취기도 핑계 삼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허락한 밤. 그럼에도 끝끝내 남자는 자신이 여자에게 무얼 바라는지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여자는, 아스트라 테이아는 자신이 그토록 잘하는 것을 모두 참아보기로 했다. 캐묻지도, 재촉하지도, 닦달하지도, 따박따박 설명을 요하지도 않기로.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 모든 관계와 감정들을 그저 받아들여 보기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떠날 생각 따위는 추호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하르드는 아마 자신을 사랑할 것이다. 혹은 그저 소유하고 싶을 뿐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두 감정은 비슷한 선을 띠고 있는 것이리라. 만일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쩌려고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을까? 그저 성격이 억세고 모난지라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변에 다른 여자는 없는 걸까, 날 이렇게 자기 옆에 묶어둬서 대체 좋은 게 뭘까 .. 따위의 의문들이 뒤늦게 피어나곤 하였으나 그와 함께 하는 순간, 또 순간에는 자꾸만 턱없는 직감이 강경하게 외친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가 내어준 품 속은 이따금 숨통을 옥죄는 듯 저를 옴싹달싹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고 그 옅은 압박감은 놀라울 정도로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축축하게 가빠오는 숨이 섞여 들어가고, 한 손에 가득 차도록 억세게 움켜잡은 살결이 죄 타버릴 것만 같았다. 누구에게서도 느껴볼 수 없었던 절박한 눈이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당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을 때, 간곡한 부탁인지 집요한 명령인지 모를 중얼거림이 입술을 겹쳐오며 비집어댈 때, 그 갈팡대는 남자가 여자에게 가장 진심 어린 듯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사랑의 이형異形
당신은 저를 별로 사랑하지 않아요 ...
바체 하르드는 반복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짧고 간단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푸른 차체 너머로 저녁은 잠겨 들고 있었다. 가도 위에는 거센 바람이 물기를 머금고 불어와선 머리칼을 흩뜨렸다. 뺨과 입술, 그리고 손가락 끝에 단정히 깎인 손톱 위로 살결을 간질이듯 굽실대는 머리카락 몇 올이 어찌나 심기에 거슬리던지.. 도로의 소음 사이로 저녁을 알리는 라디오가 속살거렸다. 미안해, 널 미워해. 신호에 걸려 차들이 멈춰있길 망정이었지, 이렇게 앞뒤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화가 치민 것은 수년 만의 일이었다. 신경질 어린 손이 안전벨트의 버튼을 몇 번이고 내리쳐 그것을 풀어냈고, 당장에 조수석 문을 열고 차체 밖으로 뛰쳐나왔다. 차도를 가로지르는 보폭이 넓었다. 닫히지 않은 차의 문짝이 덩그러니 남자와 함께 도로 한가운데에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