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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 22 / 11 / 07 ~ 22 / 11 / 11

제2장 : 22 / 11 / 27 ~ 00 / 00 / 00

제3장 : 00 / 00 / 00 ~ 00 / 00 / 00 (조사)

제4장 : 00 / 00 / 00 ~ 00 / 00 / 00 (전투)

제5장 : 00 / 00 / 00 ~ 00 / 00 / 00 (조사)

5.5장 : 00 / 00 / 00 ~ 00 / 00 / 00 (미니게임)

제6장 : 00 / 00 / 00 ~ 00 / 00 / 00

제7장 : 00 / 00 / 00 ~ 00 / 00 / 00 (조사, 전투)

제8장 : 00 / 00 / 00 ~ 00 / 00 / 00

 

 

 

 

 

 

 


제1장. 모범생은 뒷자리를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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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일 새벽이 밝았다.

어스름 속 공기가 차갑다. 바체 하르드는 자신의 검 손잡이를 문질렀다. 잘 빠진 검신이 허리 옆을 지나 끝에서 반짝인다. 제복은 잘 다려졌고 망토는 단정하며 길이 잘 든 부츠는 깨끗하다. 모든 건 완벽했다.

소집 나팔을 불기도 전인데 신전 입구에는 이미 사람이 모여 있다. 면면이 익숙하다. 매일같이 보던 얼굴들이 대부분, 그러나 처음 보는 자들도 꽤 되었다. 다른 곳에서 기사 서임을 받고 베루스로 입단한 자들일 것이다. 지난 전투 이후 기사단은 새로운 전력을 수혈해야만 했다. 기존 인원 중 기사단을 나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신전과 기사단의 분위기는 밝지 못했다. 그러나 누가 이탈자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남은 이들은 일관적이다. 지킬 가족이 없거나, 가족을 지킬 필요가 없거나. 혹은 가족을 잊었거나.

바체 하르드는 그 사이에서 익숙한 푸른빛을 찾아냈다. 졸음이 묻은 얼굴들 사이 홀로 꼿꼿하다. 흘끗 시선이 지나간 것도 같았다. 그는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명령을 하달받은 병졸처럼 테이아의 뒤로 가서 섰다. 열중쉬어 자세로 턱을 들고 정면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곧 나팔 소리가 길게 뻗어 동녘의 서광처럼 온 신전에 울려퍼졌다. 신녀와 교황의 대리인이 본 출정의 목적과 간략한 행동강령을 읊어내는 동안 작은 기사의 두 손은 묵직한 대검 손잡이 위에 오도카니 올려져 있었고, 시선은 명징히 곧은 정면을 향했다. 제 뒤에 누가 와 서있는지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자신이 속한 소대 명부가 발표되고 나서야 어떤 이름 하나에 단정한 눈썹을 치켜올리며 생각했다. '하필..' 중대나 대대라면 모를까, 소대 단위의 출정에서 과연 그와 마찰을 빚지 않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나 잠시뿐이었다.

자신의 소대장은 거의 일면식이 없는 기사였다. 아마 원정이라도 다녀온지 얼마 되지 않은 중견이리라. 각 소대장이 임무를 하달받고 단원들은 자신의 소대를 찾아 정렬하라는 명이 이어지고 나서야 제 뒤를 흘긋 돌아보며 장신의 기사에게 또박히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번 출정에서도 일전처럼 행동하시면 관용은 없습니다. 제가 속한 임무에서 당신의 시종 노릇을 할 사람은 꿈도 꾸지 마세요."

 

 

"이번 원정의 목표는 베루스와 가르텐의 경계를 가르는 드넓은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피시스 강 상류를 조사하는 것이다. 피시스 강 상류는 최근 마물의 습격으로 인한 피해가 잦았던 지역이며, 특히 발원지 부근에서 실종사고가 다수 접수되었다. 자살의 이유가 없는 사람이 절벽에서 자발적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목격된 적도 있다고 하니 강력한 정신계 마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종사건의 원인을 밝히고 후처리하도록."

공터를 가득 채운 기사단의 머리 위로 지령을 읊는 목소리가 무거운 종처럼 울린다.

"가르텐 공화국의 국경을 넘는 원정이다. 그 땅을 딛는 순간부터 가르텐의 법을 따라야 할 것이며 그곳 민중들에게 부적절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배치를 확인하며 분주한 소음을 흘려보내는 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혀들었다. 시종이라니. 그는 타인과 부조화를 이루었을지언정 기사단 내에 시종을 들인 적은 없었다. 지난번 사건으로 오해를 산 것을 모르는 그는 억울한 기분으로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소대를 찾아가라 하지 않나. 같은 소대에 배속받았으니 함께 가지. 앞장서도록."

아스트라 테이아는 뒤에 서는 것은 끔찍이도 싫어하는 기사였고, 저와 나란히 걷는 것을 좋아할 리도 없었다. 앞을 내어준 것은 그 나름의 배려였다.


이렇다 저렇다 확실한 대답없이 말을 빙빙 돌리며 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타국의 귀족 나으리들께는 당연스러운 예절 화법일지 모르나, 그 사실을 이해할 턱이 없는 여자에게는 그저 성질을 돋우기에 특효약인 말 버르장머리다. 아스트라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화를 진정시키려는 듯 그의 찌푸린 얼굴을 가만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웅성이며 제 소대를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기사들 사이에서 그들 주위에만 일순 고요함이 감돈다.

정식 기사가 된 이후로 하달받은 첫 출정은 그 긴급성과 심각도가 극심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아스트라 테이아의 인생에 큰 곡변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당시의 기억은 상당 부분 파편화되어 남아있다. 신전과 기사단이 다시금 그 정비를 가다듬고 대륙 단위로 대대적인 마물과의 선포하게 되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이번이 그녀가 진정으로 꿈꾸던 기사로서의 첫 임무라면 임무일 것이나, 어찌된 일인지 ― 이 남자가 신경을 긁지 않았더라도 ― 이미 잔뜩 지쳐있는 낯이 역력했다.

테이아는 말없이 등을 돌려 앞장서 발걸음을 옮겼고, 이윽고 열 명 남짓한 기사들이 모인 세번째 무리 앞에 당도했다.

"가르텐 출정임무 제 3소대 배치, 아스트라 테이아입나다."

제 키만한 대검을 들고 걸어오는 기사를 저 멀리서 보았을 때부터 익히 그녀에게 시달린 전적이 있던 몇몇이 노골적으로 질색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뒤따라오는 장신의 기사를 발견하자 조금 더 이상해졌다. 대놓고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던 이들은 쑥 들어갔으나 서로 흘금흘금 눈길을 교환하는 것이 할 말이 많은 얼굴들이다.

"제 3소대, 바체 하르드."

그는 앞선 이보다 짤막한 문장을 던지고 고개를 까딱였다. 소대장 옆에서 서기관이 빠른 손놀림으로 명부를 정리하는 동안 기사들은 하물을 점검하고 몸을 풀었다. 신전 입구에 노란 아침 햇살이 비치기 시작할 때쯤ㅡ

"안녕하십니까, 기사님들!"

불쑥 등장한 시커먼 무쇠 냄비가 말을 했다. 자세히 보니 냄비는 아니고 그걸 간신히 받치고 선 사내애였다. 바체 하르드의 눈에는 둘이 딱히 다를 것이 없어 보였지만. 딱 제 몸통만한 무쇠 냄비에 몸이 가려진 소년은 서글서글하니 성격이 좋아 보였다. 열 대여섯 되었을까? 냄비같은 거칠거칠한 흑발 아래 앳된 눈에는 신록처럼 싱그러운 녹빛이 돌았다.

"요리사로 따라가게 된 필리츠입니다. 필리라고 불러주세요! 기사님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생선을 잘 굽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체 하르드는 귀가 아팠다.

 


 

'무슨 이런 짐덩이 같은 .... '

제 몸만한 냄비를 받치고 선 소년을 제 몸만한 대검을 쥔 여자가 썩 달갑지만은 않은 눈빛으로 슬쩍 보았으나, 소대원들의 맛대가리 없는 음식을 견뎌내거나 자신이 그 잡일을 도맡아할 생각을 잠시 하니 없는 것보다야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대장은 쾌활한 면모가 짙은 사람이었는데, 소대원들 사이의 미묘한 긴장관계 같은 것은 대충 기합으로 무시하는 부류인지라 어느 두 사람을 두고 휘몰아치는 서늘한 거리감 따위를 눈치채지 못한 듯 싶었다.

간단한 통성명과 행군 계획에 대한 논의가 오가는 동안 아스트라 테이아는 소대장의 옆에 찰싹 붙어 서서는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지금 말씀하시는 일정은 너무 여유로운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강행한다고 해도 불평할 사람은 없을텐데요." "상황에 대한 현지 보고는 이게 전부인가요? 좀 더 상세한 정보가 전해졌다고 들었습니다만." 따위로 하나하나 캐물어댔으나, 중견의 대장직에게는 그저 신출내기 기사의 때이른 열의로 보였는지 호쾌한 웃음과 함께 어물쩍 넘겨지고 말았다.

결국 대열을 맞춰 본격적으로 신전을 나설 즈음에는 힘차게 구령하는 소대장과, 은근히 저들끼리 모여 붙은 기사들, 그리고 최후방에 배치된 여자가 웬 수다스러운 소년 요리사가 붙임성있게 걸어오는 대화를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일행의 막내인 소년은 비교적 앳되어 보이는 청발의 기사 옆자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 그녀를 자기 또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바체 하르드는 그의 비실한 조랑말이 그녀의 군마 옆에 위험하게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았다.

"기사님들이 신으시는 부츠는 소리가 적게 나는 것 같아요. 제 것보다 가벼운 건가요? 혹시 마물 가죽으로 만들어졌나요?"

"저도 마물을 잡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지요? 저는 물고기는 아주 잘 잡지만 물고기 비늘을 가지고 부츠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승마할 때 망토가 걸리적거리지는 않으신가요? 기사단에서는 망토를 멋있게 흩날리는 법도 가르쳐 준다고 들었어요!"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수련 기간이 꽤 길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아주 어릴 때부터ㅡ"

"그녀가 언제부터 수련을 했든."

참다 못한 바체 하르드가 소년의 말을 잘랐다.

"네가 무슨 상관이지."

"아니 저는 그냥..."

"기승 상태에서는 입을 다물고 전방을 주시해라."

그는 다소 시무룩해진 뒷모습을 확인하고 인상을 썼다.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자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 입을 열었다가 혀를 씹어 피를 보기 일쑤였다. 그래서 언질을 주었을 뿐이다. 잠시간 구보로 달리는 둔탁한 말발굽 소리와 흙먼지만이 정적을 메웠다.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들은 체 않는 것이 무례의 극치임은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지금은 온 신경이 저 선두를 향해 곤두서 있었기에 테이아는 제 옆의 소년이 얼빠진 모양새로 말을 걸어오든 말든, 그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앞의 시뻘건 뒷통수를 아주 뚫어버리겠다는 듯 노려보며 자신이 어째서 이 최후방에 내버려졌는지에 대해 끊임없는 의구심을 품고 있자면 고삐를 쥔 장갑 사이로 축축히 땀이 배어든다. 윙윙거리는 소음같은 재잘댐이 슬슬 거슬린다고 생각할 즈음 어느 우뚝 튀어나온 저음의 시비조에 그 무고한 성가심이 멎어들었다. 말발굽 소리가 긴장감있는 박차로 얼마나 이어졌을까, 그제야 입을 열어 소년이 있는 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서릿발같이 쏘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공적인 임무 외의 사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을 타고 있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저를 향한 불필요한 질문은 삼가주셨으면 하네요."

그녀로서는 답지않게 누군가의 말에 동조한 것이었으나, 사실상 그 어느 쪽에도 신경을 기울이고 있지는 않았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은 작은 개울물에 이르러 소대장의 잠시 쉬어가겠다는 우렁찬 고함이 있고나서야 비로소 소년을 풀어주었다.

말들이 목을 축이고 기사들은 소대장의 주위에 모여 무어라 왁자지껄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테이아는 선뜻 그 사이에 끼지 못하고 제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냇가에 오도카니 서 있을 뿐이었다. 출발부터 무엇 하나 제 뜻대로 되지 않으니 온 속이 죄 뒤죽박죽 울렁이는 기분에 구역이 치미는 듯 했다.

 


그녀의 동조에 장기가 불협음을 낸 것은 바체 하르드 뿐이었다. 그는 다소 긴장되는 심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으나 앞선 기수가 뒤를 돌아보는 일은 휴식이 선언되고 모두가 하마(下馬)할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개울에 고개를 숙이고 물을 마시던 첼레가 갈색 갈기를 허공에 털었다. 옆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첼레는 기사단에서 배급받은 그의 말이었다. 기마술을 배우던 첫 해에 그는 블라우에서 어릴 적부터 타던 애마를 데려왔으나 그 백마는 너무 빠르게 뛰었고, 너무 빠르게 지쳤으며,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바체 하르드는 두 주일만에 그 말을 돌려보내야 했다.

첼레는 가늘게 흐르는 개울물이 감질났는지 고개를 처박았다가 콧김과 함께 한 번 더 푸르륵 털었고, 이번에는 분명하게 옆에 서 있던 작은 인형 위로 물이 흩어졌다.

"첼레.'

바체 하르드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불렀다. 첼레는 뭐 불만 있냐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명백히 대거리를 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숲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결국 옆으로 한 발짝 나와 아스트라 테이아에게 말을 붙였다.

"...괜찮나."


 

테이아의 말은 흑단같이 검은 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질이 사납고 쉬이 길들여지지 않아 마굿간에서도 돌보기 어려워하던 흉포한 녀석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런 녀석이 어찌된 일인지 신출내기 수습기사로서 마굿간 청소를 맡게 된 테이아에게 유달리 온순히 굴어 사실상 간택에 가까운 형태로 제 주인을 찾은 것이다. 포우―녀석의 이름이다―는 저희들 쪽으로 물이 튀기자 첼레와 그 못마땅한 주인놈을 향해 눈을 치뜨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발굽을 굴러대었으나, 테이아가 고삐를 슬쩍 잡아당기는 손길에는 그새 온순하게 자신의 주인을 향해 목을 숙였다.

"... 임무 외의 사담은 ..."

싸늘하게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었으나 실상 이미 전해질 것은 전부 튀어나온 후였다. 무얼 그리 골똘히 고민하는지 제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몇 번 쓸어올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으나, 이내 고개를 빳빳히 들고 말을 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설마 이번 출정이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지 않느냐는 말씀을 하시는 거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하르드는 첼레가 위협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고삐를 아래로 꽉 끌어내리고 테이아를 응시했다. 갈색 말이 그의 무릎에 대고 불만스러운 콧김을 뿜었다.

"내 말 때문에 물이 튀었기에 괜찮냐고 물었다."

말투며 몸짓에서 발산되는 공격성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침착한 어투였다. 회색 눈동자가 찬찬히 상대의 얼굴을 살핀다. 그는 움직임이 별로 없었다.

"괜찮지 않아 보이는군."

그리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출정이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나?"


 

상대방이 고작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거기에 쓸데없이 날을 세운 것이 도리어 제 화를 불렀다. 일반인 축에서도 신체조건이 유약한지라 기사단에 들어오고 나서는 특히나 제 몸을 걱정하거나 비웃거나, 무시당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럴 때마다 불같이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잠재우며 ―잠재우지 못할 때도 잦았다― 필사적으로 단련에 힘썼던지라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스트라 테이아에게 '신체조건'에 대한 화제는 금기나 마찬가지. 아니나다를까 잠시 누그러졌던 표정이 금새 돌변한다.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 하세요. 절 뭘로 보시는거죠? 고작 반나절 말을 타고 행군했을 뿐인데 지칠 사람으로요?"

그녀가 언성을 바락 높이자 개울가에서 조금 떨어져있던 소대장과 기사들이 이쪽을 흘긋거린다.

 


그가 아스트라 테이아의 노력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굉장히 눈에 띄는 존재였고―그에게만― 어디에 서든 무엇을 하든 존재감을 뿜어냈으며 ―마찬가지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언제나, 테이아는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질문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던진 이유는 그만큼 그녀가 불안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을 꺼내기에."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기세에 바체 하르드는 저항 없이 눈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아담한 집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면 어깨를 으쓱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 더 커다란 집에서 자랐고, 그런 실없는 몸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정하여 다시 묻지. 이번 출정이 힘에 부치나?"

 

 

테이아가 조금 더 큰 소리로 "말도 안되는..." 하며 쏘아붙이려던 차, 저 편에서 제롬 소대장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힘차게 손을 얹으며 말을 끊었다.

"동료끼리 싸우면 쓰나~ 자네들 기수는 이런저런 일도 겪었으니 서로 끈끈할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보지?"

제롬은 호방한 웃음으로 테이아의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으나, 특별한 설명을 요하는 것 같진 않았다.

"소대장님, 이건.."

테이아가 직속 상관에게만큼은 더 밉보이고 싶지 않다는 혼신의 눈빛으로 또 입을 열었으나 제롬이 고개를 강경히 내저었다.

"내 임무에선 동료 간의 마찰은 있을 수 없다네. 서로가 설령 부모의 원수라도 싸움은 엄금한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공동 책임을 물테니 그리 알아. 불만 있나?"

대장에게 체구와 계급으로 전부 기가 눌린 여자는 온 몸으로 불만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차마 입을 떼지 못한다.

 

 

하르드는 소대장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어려울 것은 없었다. 테이아의 눈빛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했으나 이 상황을 초래한 그가 도움을 주려고 입을 뗐다가는 분위기가 악화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따라서 그는 나무둥치처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입을 다문 두 기사를 확인한 제롬은 썩 만족스러운 태도로 몸을 휙 돌렸다.

"이동한다! 전원 승마!!"

소대장의 망토자락이 기세등등히 펄럭이고, 기사들은 일제히 안장에 올랐다. 각반 부딪히는 쇳소리에 물을 먹은 말들이 머리를 쳐들었다.

고개를 돌리던 두 사람의 눈이 부딪혔다. 일순간 평원에 새파란 불꽃이 타올랐다.

 

 

 

 

 

제2장. (가제) 낙오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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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목을 울린다. 비가 쏟아진다.

 

기사단은 쉼없이 벌판을 달렸다. 말발굽이 검은 흙을 파헤치고, 우는 잔디를 내려밟고, 물 튀기는 풀줄기를 헤쳤다. 앞선 조가 속도를 올리면 뒷조가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빗발이 개떼처럼 울어댄다. 눈을 뜨기가 어렵다. 귀가 멍멍하고 몸이 흔들리고 앞이 아득한, 이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었다가 다시 낯설어질 무렵,

 

"전방에 숲이 있습니다!"

 

저 앞에서 가물가물한 단원이 목청을 높인다. 바체 하르드는 소대장의 위치를 확인하려 했으나 빗줄기가 거세 바로 앞 줄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속도 유지한다!"

 

앞쪽 어딘가에서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러나 그 소리 또한 아득하다. 앞 조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하르드는 이를 악물고 안장을 허벅지로 더 조였다. 첼레가 속도를 높이는 것과 동시에 나란히 달리고 있던 검은 말이 같은 움직임이 보인다. 그러는 동안에도 속도가 점점 오른다. 이 날씨에. 소대장은 완전히 돌아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때, 하르드의 등에 뭔가 오싹 올랐다. 온다. 거대한 무언가가 점점 가까워진다. 조금씩 빠르게, 점점 크게, 그리고-

 

쿵-!!!

 

첼레가 천둥처럼 온몸을 뒤틀고, 그는 튕겨나가는 몸을 등자에 발끝을 걸친 채 간신히 지탱했다. 숨을 훅 들이키면 다음 순간 억센 잔가지들 얼굴을 덮쳐 온다. 앞에서 어떤 외침이 터졌으나 그는 듣지 못했다. 잘 훈련받은 말은 비명같은 울음소리를 내뱉지 않는 데 성공했으나 흥분감에 앞뒤로 잘게 뛰어 댔다. 움직임이 멈추었을 때서야 하르드는 착지하는 것인지 낙마하는 것인지 모를 자세로 흙탕물 흥건한 바닥에 떨어졌다. 

 

강인하게 단련된 몸을 일으킨 하르드는 철퍽철퍽 걸어가 그들을 덮친 물체를 확인했다. 거센 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내린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속이 썩어들어간 것 같은 거대한 고목이었다. 그 너머로 마지막 단원의 뒷모습이 사라져 간다. 땅의 진동이 점차 사그라든다. 흙 묻은 뺨에 물줄기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하르드는 고개를 돌려 옆 기수를 확인했다. 

 

"다쳤나?"

 


 

정식 기사가 되기 이전은 물론이요, 이후로도 이같은 여정을 경험해본 적이 있었을리 만무하다. 신체의 단련과 정신의 무장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대처할 지혜를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경험만이 제련할 수 있는 무기.

그러한 면에서 쪼잘거리고 시끄럽다는 이유만으로 이같은 악천후에 신출내기 기사 하나를 방치해두고, 그 곁에 어떤 이유인진 몰라도 최후방을 함께 자처한 또다른 신출내기를 함께 붙여둔 것은 제롬 소대장의 단순한 방임과 태만이었을까? 혹은 ...

어찌되었건 우레 빗발치는 이 진흙탕 속에 그 작은 기사 하나는 곧장 내동댕이쳐졌고, 주인을 미처 잡아내지 못한 검은 말이 발굽을 높이 들고 울부짖는 소리가 빗발 사이를 쏘다닌다.

테이아는 질퍽이는 흙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도 곧장 고개를 들어 상황을 판별하려 했으나, 머리가 온통 웅웅거리고 귓가에는 거센 빗물이 소용돌이치는 소리만 들려오는 터에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두 손으로 땅만을 겨우 짚고 있었다.

 

 


 

 

"테이아."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조급한 손길이 늘어진 어깨를 붙잡는다. 타인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평생의 교육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세상에 던져지게 되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깨어지곤 한다. 베루스의 흰 제복은 이미 진흙탕을 굴렀다. 신성제국의 고상한 기사님은 어디로 갔는가? 손에 닿는 것은 시린 냉기, 텁텁한 불안정, 디딜 곳 하나 없는 중압감이 전부.

"부상인가? 문제가 있으면 말을 해."

땅에 댄 무릎의 천과 부츠가 흠뻑 젖어들었다. 광활한 땅 위에 말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잔뜩 흐려진 시야에 희멀건한 것이 들어차고 무어라 말을 걸어오는 듯 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팔에 힘이 풀려 진창 속에 쓰러질 듯 하였으나 무언가가 자신을 단단히 지탱하기에 가까스로 잠시 그것에 체중을 싣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제 뜻대로 몸을 가눌 수 없을 때에는 가만 홀로 어둠 속에 저며든다. 그리고 하나, 둘 ... 숫자가 아닌 다른 것을 떠올리며 버텨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이름 모를 노랫말과 옛 이야기 속에 떠돌던 이들에게 힘을 얻고 의지하던 소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정해진 체 규칙적인,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끝도 없이 명명된 어느 단위 만이 그녀를 침착하게 만든다.

몇십의 수가 흘렀을까, 떨어질 때 바윗돌에 부딪힌 오른 어깨의 통증이 생경해진다. 정체모를 괴이와 향수 따위보다 명확한 고통이 더 견딜만 하지. 테이아는 눈을 뜨고 주저앉은 채로 자신을 붙잡고 있던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뒷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포우의 안장에 매달아두었던 대검이 먼 수풀 쪽으로 떨어져 처박힌 것이다.

" ... 문제 없습니다. 검을 가져오죠. 말들을 진정시키고 계세요."

신음을 참아내는 목소리로 나지막히, 그러나 또렷히 말하는 한편 제 어깨를 놓으라는 뜻은 눈짓으로만 은근히 전하여 그를 대한다.

 


 

정제된 단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바체 하르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람이 정신을 가다듬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마침내 그 눈이 뜨이고 명령이 하달된다. 억눌린 목소리와는 달리 선명히 읽히는 의사표현에 손이 주춤거리며 떨어졌다. 그에게 달리 무슨 선택지가 있겠는가.

 

 

빗속에서 주인을 발견한 말이 그 주위를 한 바퀴 둥글게 돌고 앞에 멈추어 섰다. 다각거릴 때마다 약올리듯 흙탕물이 튀어올랐다. 하르드는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말을 무시하며 일어섰다. 빗소리 너머에서 포우의 불안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데리고 왔어야지."

 

첼레가 어림도 없다는 듯 콧김을 뿜는다. 하르드는 첼레의 고삐를 쥐고 그다지 친하지 못한 말에게로 다가갔다. 한껏 예민해진 검은 말은 인간이 나타나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첼레를 발견하고는 다시 질색하듯 게걸음질을 쳤다. 

 

"포우, 이리 와." 

 

턱도 없는 말이었다.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질퍽이는 숲길을 헤쳐나가는 몸이 빗줄기나 돌풍 따위에 이따금 휘청이면서도 제가 목표한 곳에 도달한다. 옷을 다 적셔대는 추위 혹은 살갗 아래에서 저며드는 고통, 어느 쪽일지 모를 이유로 떨리는 손을 감싼 흰 장갑이 은빛 대검을 가까스로 잡아들었다. 왼팔로 묵직한 검을 들어올려 상태를 확인했고 곧이어 느릿히 두 말과 한 남자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목격했다.

 

목적지로 향하는 대강의 지리는 파악해 두었으나 더 이상 기상이 악화된다면 한 치 앞의 방향도 분간할 수 없어지리라. 앞서 멀어진 일행의 흔적조차 이미 다 사라져가는 차다. 테이아는 하르드의 곁으로 다가와 가벼이 고갯짓을 하는 것만으로 제 소유의 말을 진정시킨다. 포우는 첼레와 하르드를 향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불만스럽다는 티를 한껏 내며 주인의 곁에 다가온다.

 

하르드에게 등을 돌린 채 포우의 안장에 다시 검을 채워놓는 동작이 굼뜨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합류하죠. 북동쪽으로 난 길일겁니다."

 


 

함께 낙오된 기사가 검을 다시 채우고, 장비를 점검하고, 안장을 조이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려 출발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 마침내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났을 때, 하르드는 등자에 발을 걸고 가볍게 몸을 띄워 안장에 올라앉는 것으로 준비를 마쳤다. 흠뻑 젖은 천이 몸에 달라붙고 늘어지는데 아직 조금도 지치지 않은 사람처럼 몸놀림이 가벼웠다.

 

파란 머리 기사의 정돈되지 않은 매무새가 낯설다. 하르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삐를 뒤로 당겼다.

 

"앞장서고 싶으면 그렇게 해."

 


 

동정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에는 대꾸도 하지않고 제 말에 올라타 고삐를 세게 당긴다. 기사의 검은 말은 제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이 없는 듯 곧장 긴 울음과 함께 진창 숲길을 달려 나간다.

 

빗발이 거세짐에 따라 시야는 온통 안개진 듯 뿌옇게 흐려지고 기억에 의존해 일행의 뒤를 좇음에도, 그 확신이 함께 희미해져 간다. 테이아는 그럼에도 어딘가로 달려나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 멈춰서는 것을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하르드는 첼레가 검은 말을 따라가도록 내버려두고 비바람처럼 스쳐가는 흙바닥을 신중히 살폈다. 블라우에서 사냥을 하던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에 그는 기사단에 와서 추적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간 대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질펀한 바닥에 남은 흔적이 비에 쓸려 점점 흐릿해져 간다.

 

하르드는 인상을 쓰고 한참 하부를 주시하다가 그다지 강하지 않은 목소리로 외쳤다.

 

"방금 방향을 틀었어야 하는 것 같은데."

 

목소리는 비에 쓸리다가 간신히 테이아에게 가서 닿는다. 하르드는 구보로 달리는 말 위에서 저 너머 보이지 않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출발 전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원정대의 경로는 북동쪽이 확실하다. 하르드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출발 전에 직접 확인한 정보를 믿어야 할까?

 

 


 

그의 목소리가 가서 닿았을 리 만무하다. 아니, 빗소리를 뚫고도 그 곧고 또렷하여 귀에 거슬릴 정도로 바른 발음을 가진 목소리는 누구에게나 제대로 전해진다.

 

허나 테이아는 오로지 앞만을 보고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있기나 하냐는 듯 방향을 틀지 않는 것이었다. 명백한 무시. 오히려 제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인다.

 

 


 

앞서가는 기수의 뒷모습을 흔들리는 시야 안에 잠시 담았다가, 주장을 이어가지 않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는 어느 쪽의 선택에도 자신이 없었다. 바체 하르드는 언제나 일을 망쳐버리는 쪽이었기 때문에.

 

-

 

 

그렇게 한참을 달려가다 보면 토양이 점차 거칠어진다. 빗길에 시야를 확보하며 발까지 헛디디지 않으려 힘쓰다보니 강인한 군마들도 숨을 몰아쉬기 시작한다. 차가운 공기에 거대한 말의 열기가 닿아 희뿌연 김이 오른다.

 

차차 시야가 가로막힌다. 발목에서부터 기어올라와 어깨까지 수풀이 우거지고, 앞을 가로막는 무거운 지형 탓에 날이 빠르게 어두워진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숨을 쉬고 있는 거대한 산맥의 아가리로 말을 몰아 달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하르드는 첼레의 등근육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고 마지막 박차를 가해 앞사람을 따라잡았다. 수 시간만의 대화였다.

 

"쉬었다 가지."

 


 

오른 어깨가 줄곧 얼얼하다. 뼈가 어그러지기라도 한 것 같은 고통이 아마 나약한 착각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한다. 고삐를 단단히 쥐지 못하고 한 손이 자꾸만 미끄러져 자세가 몇 번이고 흐트러지는 것을 고쳐 잡아야 했다. 시야가 좁아지고 찬 기운이 서며든다. 테이아의 눈에는 제 진로의 극점에 분명히 가르텐으로 향하는 옳은 길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리석은 확신이 있었다.

 

어두운 옆에서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꽂혀오자 아주 잠시 눈을 돌린다.

 

"지치셨습니까?"

 


 

"내가 아니라-"

 

하르드는 말하다 말고 인상을 미약하게 찡그렸다. 앞에 있는 기사의 신체가 평소의 상태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휴식이 필요한 것 같군. 말들이."

 

그는 그녀와 검은 말의 중간 어디쯤을 바라보며 말했다가, 늦지 않게 주어를 덧붙였다.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려 강행군을 하는 결과를 불러오고 싶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 않고 말의 속도를 늦춘다.

 


 

대꾸하지 않고 그저 제 갈 길을 가는가 싶었으나, 한참을 앞선 곳에서야 검은 말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빗발은 잦아들지 않고 숲은 어둑하니 푸르게 잠겨든다.

 

느린 동작으로 말에서 내려 고삐를 끌어 아름드리 나무 아래 줄을 맨다. 나뭇잎 새로 가는 빗줄기가 끊임없이 엉망이 된 단복을 적신다. 해가 완전히 져 버리기 전에 일행과 합류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으나 좀처럼 입을 열 수 없었다.

 


 

하르드는 이미 저 뒤쪽에서 마구를 끌렀다. 그는 말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후, 땅에서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씩 주워들며 말을 끌고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는 움직임 없이 선 상대 앞을 멈추지 않고 지나쳐 갔다.

 

고삐를 옆 둥치에 두어 번 감아놓자 첼레는 제 자리를 알고 얌전히 멈춰 섰다. 하르드는 지형을 살피더니, 적당한 자리를 찾아내 젖은 부츠 뒷굽으로 원을 그리고 흙바닥을 다져 모아온 나뭇가지들을 그 안에 내려놓았다.

 

방금 만들어진 작은 간이 야영지 뒤로 큰 나무가 부러져 반쯤 넘어진 형상으로 옆 나무에 걸쳐 있다. 그걸 발견한 하르드는 뒤로 걸어가 죽은 나무 기둥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발을 대자 꺼떡거린다. 나무 기둥을 강하게 밀어 그려놓은 원 옆으로 무너트리자 물기가 요란하게 흩어졌다.

 

잠시 지나자 빗방울이 풀잎을 두드리는 고요가 다시 찾아온다.

 

"앉아, 테이아."

 


 

나무가 쿵주저앉는 소리에 자동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핀다. 무슨 말을 해도 명령조로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었으나 불필요한 마찰을 빚는 것도 낭비일 터였다. 그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지는 않고 대신 그 앞에 모인 가지들 중에 심하게 젖어 있는 것을 골라 하나 하나 뒤로 던져 버린다. , ..

 

심하게 곱슬진 머리가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뒤로 쓸어넘기다, 자신의 흰 장갑이 못 봐줄 꼴로 더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심기가 불편하다. 두 손의 장갑을 모두 신경질적으로 벗어 주머니에 우겨넣고 맨 손으로 나뭇가지를 잘라 불을 피워보려 이리저리 노력한다.

 

되는 것이 무엇 하나 없던 하루에 이변도 없이 해가 저물 모양이다.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가 주워온 나무를 뒤로 휙 휙 내던져 버리는 테이아를 빤히 쳐다본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길 때까지도 가만히 보기만 하고 있다가, 장갑을 벗기 시작하자 고개를 숙이며 뒤로 돌아섰다.

 

뒤에서 딱딱 나무 부러트리는 소리가 난다. 하르드는 참견하지 않고 그대로 첼레에게로 걸어갔다. 갈색 말이 콧김을 뿜으며 머리를 들이밀자 손으로 가볍게 저지시키고는, 어깨에 축 늘어져 있던 망토를 떼어낸다. 망토를 고정하고 있던 버클이 절그럭거리며 떨어진다. 출정식 때문에 입고 있었던 불편한 정복 자켓도 벗는다. 첫 번째 휴식 때 갈아입었어야 했는데 누군가와 대화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이미 흐트러진 크라바트를 풀고 몸을 옥죄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풀러낸다. 그게 모두 끝난 후에는 옷가지들을 정돈해 옆에 챙겼다.

 

장작더미 옆으로 돌아왔을 때는 셔츠와 바지, 부츠, 허리에 찬 장검과 허벅지에 매단 단도만 남은 채였다. 안장 주머니에서 꺼내온 부싯돌을 테이아에 의해 깐깐히 선별된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더니, 큰 가지 하나를 빼 들고 가서 쓰러진 나무 둥치에 걸터앉는다.


 

등 너머로 그가 복장을 간소히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긴 망토나 묵직해진 자켓 따위를 가벼이 벗어던질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임무 중이었다. 비록 괴팍한 상관에게 버림받고 어디서 거대한 짐승이나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를 숲 속에 하르드라는 인간과 단 둘이 남겨져 있더라도엄연한 임무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조용히 건네고 간 부싯돌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았으나 좀처럼 연기조차 피어오르지 않는 꼴에 부아가 치민다. 습관적으로 오른팔에 힘을 준 채 그것을 내리쳤다가 채 잦아들지 않는 격통에 이를 악물어 신음을 참아낸다. 비가 아닌 식은 땀에 이마가 젖어들었다.

 

오늘 밤만 넘겨낸다면 비는 멎을 것이다. 해를 보고 방향을 제대로 짐작할 수 있으리라. 지나다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단 하룻밤만 견디면 된다.

 


 

의자가 된 나무 위에 편한 자세를 잡은 하르드는 허벅지의 가죽 검집에서 묵직한 단도를 빼냈다. 장작 더미에서 빼내 온 굵은 가지의 물 먹은 겉면을 긁어내자 부드럽게 슥슥 잘려나가고, 불 붙이기 좋게 마른 속이 천처럼 얇게 포가 뜨여 구부러진다. 잔뜩 젖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모닥불 자리 앞에서 씨름하는 기사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저쪽에서 스스로의 손을 고문하는 고통스러운 사건이 행해짐과 동시에 나무를 갈던 움직임이 딱 멈춘다. 

 

"......"

 

 하르드는 조용히 다가와 허리를 숙이더니 장작더미 맨 위에 자기가 다듬은 마른 나무를 올려놓고, 테이아 앞에 말없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큰 손바닥이 눈 앞에 슬그머니 와 펼쳐진다. 그 빈 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채자마자 손의 주인을 잠시 올려다보는 낯에 묻은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고약한 몰골을 하고도 아무 말 없이 잠시 시선을 맞추다가 이내 홱, 온 몸을 돌려서는 그를 등지고 앉는다. .. ... 부싯돌을 튀기는 소리가 조급하게 이어진다.

 

빗소리가 멀리 잦아들고 그 사이를 검은 추위가 서민다. 이제 빛이 없이는 한 치 앞도 살피기 어려워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이유란 대체 뭘까 ...

 

 


 

끝나지 않을 듯한 파열음은 빗소리에 먹혀 작게만 들린다. 수면이 거꾸로 내려오는 것처럼 숲이 그림자로 잠겨든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체온이 식어 차가워지고. 숲에 들어온 뒤로 나뭇잎에 막혀 조금 약해진 빗방울이 꾸준히 피부를 두드린다.

 

부싯돌 앞에 반짝이는 잔상이 일었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한다. 바체 하르드는 몇 분쯤 그걸 보고만 있다가, 자기가 잘라 온 얇게 포 뜬 마른 나무 속을 부싯돌 아래에 가져다 대고 반대손으로 바람을 막았다. 그 즉시 불씨가 눈에 보일만큼 더 크게 붙었다가 작아진다.

 

하르드는 조급해하다가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게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불씨가 다시 커지기 시작하자 각도를 조정해 콩알만한 불이 나무 피를 한 겹씩 살라먹게 했다. 불이 점점 커지며 나뭇가지 전체에 안정적으로 달라붙는다.

 


 

 

작은 불길이 일어 재 같은 남자의 눈 안에 빛이 드리운다. 불 붙은 나뭇가지 너머로 그 얼굴의 윤곽이 도드라진다. 일순 고요히 바람이 멎어 그 불씨가 사라지지 않게 돕는 듯 하다. 하르드가 그것을 살리려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 테이아는 사위에 감도는 적막을 남몰래 두려워하였고, 따뜻히 피어오르는 열기에 부싯돌에 쓸린 상처들이 잘게 짓쑤시어진다는 감각을 느낀다.

 

속이 욱신댄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크게 찌푸리는 까닭은 그 남자가, 그 빛이 가져다 준 순간에 자신이 얼마나 기댈 수 있었는지를 들통내지 않기 위함이다.

 

말들이 불빛을 보고 우짖는다. 다시 바람과 함께 옅은 빗방울이 쏘다닌다. 테이아는 그가 나뭇가지를 잡은 손에 닿지 않으려 애쓰며 제 손을 뻗는다. 차갑게 젖은 손 끝에 무심코 그의 손등이 멈춘다. 잠시 굳었으나 곧 가지를 제가 가로채 나무 무더기로 가져가 큰 불빛을 만들었다.

 

등 뒤가 따갑다. 그리고 손 끝이 시리다.

 


 

퍼렇기만 했던 시야가 따뜻한 색깔로 번져갔다. 코앞에 있던 온기가 손아귀를 빠져나갈 때. 하르드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작은 빛이 적막 속에서 연속된 선을 그린다.

 

바람이 휙 일었다. 테이아가 사라진 자리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곧이어 불빛이 커지고 커다란 원 뒤로 그림자가 너울거리기 시작한다. 말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하르드는 테이아를 계속 바라보았다. 방금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약한 부분을 금방이라도 잡아낼 것처럼 끈질기게 바라본다.

 


 

오도카니 앉은 작은 그림자는 솟아오르는 불길 앞에서 두 뺨이 홧홧해지도록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축 젖은 옷과 머리가 금세 마를 것 같지는 않았다. 

 

소인원으로 구성된 무리에서 이탈할 상황이라곤 걱정해두지 않은 탓에 안장에 매인 짐이라곤 여유분의 옷가지와 개인용 지도, 나침반과 가르텐 일대의 상황을 전하는 보고서의 수필 사본 따위가 전부였다. 철 모르고 조잘대던 작은 소년이 지고 있었을 식량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원정이 시작된지 반나절만에 길을 잃은 부하들에 대해 그 소대장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걱정한다. 기사 직위를 받은지 이제 겨우 반 년이다. 기분 나쁜 소리들이 머릿속에 윙윙댄다. 

 

파란 눈 안에 나부끼는 잿가루가 내려앉아 무심코 두 눈을 감고 손등으로 세게 비비어 훔쳐낸다. 아스트라 테이아는 꼭 혼자 버려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테이아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불 앞에 소리 없이 앉아있는 등이 손바닥만하다. 

 

하르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안장에 부싯돌이나 여벌옷, 나침반, 지혈제 같은 필수용품이 있었고, 수통과 약간의 비상식량도 가져왔다. 베루스로 돌아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끝내 합류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나침반이 있는 이상 객사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바체 하르드에게 제롬의 평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아무런 목표가 없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대상도 없었고, 그에게 걸려 있는 거의 없다시피 한 기대에 부응해줄 이유도 없었다. 다만 관성에 의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 아직 있던가?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할 대상이. 하르드는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약속을 떠올렸다. 

 

"...물 먹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체온을 전부 뺏길 거다. 지금 환복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리려다 말았다. 이제서야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닐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닿는다. 제 무릎을 모아 감싸 안은 채 잠시 대답을 고민하며 고요함이 흐른다. 먼 데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낮고 거대한 울음소리처럼 숲을 비잉 멤돌아 간다. 그것이 두어번 지나 멎고 난 후에 작은 대답이 있다. 

 

"불 앞에 앉아 있잖아요. 곧 마를 겁니다. 옷이 젖은 건 피차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한 겹만 입고 있으면 금세 마르지만 물 먹은 걸 여러 겹 입고 있으면 절대 마르지 않아. 정복은 탈의해." 

 

체온은 생명과 직결된다. 진지하게 건넨 충고였다. 그럼에도 상대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자 고민 끝에 제안을 건넨다. 

 

"내일 베루스로 돌아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가 그런 말을 건네든 말든 속으로만 주제넘는 충고라고 생각하며 그냥 무시할 셈이었다. 단 둘이 남겨져 대화랄 것을 한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와 나누었던 짤막한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면 어떠한 부분적인 파편성을 띠고 있을 뿐, 여타의 사람들과 주고받는 대화같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으름장이라도 놓는 듯한 말에 곧장 고개를 홱하니 돌려선 두 눈을 치켜뜬다. 무언의 경고가 짧은 침묵 속에 담겨 있다.

 

"... 동이 트는대로 가르텐을 향해 출발합니다. 목표 지점이 어디인진 알아요. 내일 중엔 반드시 합류합니다. 쓸데없는 참견을 할 체력은 남아있으신가 보죠? 일 없이 제게 충고하느니 불이나 쬐다 눈을 붙이시는 편을 권하고 싶네요."

 

그의 다정해지겠다던 약속은 테이아의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마침내 돌아본 얼굴을 기껍게 마주한다. 몸 상태가 나빠 보여 걱정했는데 두 눈이 평소처럼 빛나는 것을 보아 기분은 썩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일 중에 반드시 합류한다는 단정적인 문장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날이 서 있는 뒷 문장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사람의 일시적인 짜증으로 받아들였다.

 

"몸이 좋지 않아 보이던데. 이만 자는 게 좋겠어. 내가 먼저 불침번을 설 테니, 동 트기 세 시간 전에 교대하지."

 

하르드는 다정하게 제의했다.

 


 

다시 고개를 모닥불 쪽으로 돌린다. 산발이 된 머리에 누덕누덕한 흰 리본이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아뇨,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신경 써 주어 고맙다든가 하는 말 하나 없이 표정없는 뒷통수가 짧게 대꾸한다.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게 무슨 뜻이지? 불침번을 혼자 서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몸이 온전치 않으면 휴식을 취할 줄도 알아야지. 손부터 제대로 치료하고 자도록 해. 나는 그대가 무얼 하든 새벽까지 자지 않을 테니까, 설마 둘 다 깨어있는 비효율적인 방법을 택하지는 않겠지."

 

의아한 기색으로 시작한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는다.

 


 

무어라 더 설명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겠으나 굳이 등 뒤의 남자에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추위와 피로, 그리고 어떤 간극들은 인간의 이성을 이리저리 흐려대기 일쑤이므로.

 

"스스로도 비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제가 무얼 하든 자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건 대체 무슨 저의입니까?"

 

나뭇가지가 타오르는 소리, 저 먼 곳에서 여윈 나무가 우지끈 주저앉는 소리.

 

"휴식이라면 아까부터 계속 취하고 있잖아요. 지긋지긋할 정도로.."

 


 

"멀쩡하지 않은 사람은 재우겠다는 저의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번은 나누어 서는 게 기사단의 규칙이야. 규칙을 지키지 않겠다는 건가? 끝까지 우길 거라면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똑바로 얘기해. "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배경 속에서 목소리가 낮아진다. 잠시 동안 타닥거리며 불꽃 튀는 소리만 지나가고.

 

"...그렇게 깨어 있으면 더 빨리 도착하기라도 할 것 같나? 틀린 길이 맞는 길이 되나? 실수가 없어지기라도 하나?"

 


 

틀린 길이 맞는 길이 되겠느냐는 말이 나왔을 때 이미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날이 한껏 선 표정을 하고 저보다 한참 큰 남자의 두 눈을 노려보는 것이다. 등 뒤에서 벌건 불이 무언가 태우고 살라 먹을 것처럼 활활 탄다. 나무 타는 연기가 매캐히 퍼져 비와 함께 낮게 가라앉는다. 감히 자신에게 실수라는 말을 내뱉은 저 입의 탓이다. 많은 말을 삼킨다. 쓸모없는 감정 소모를 할 정도의 심적인 여유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이 이러한 태도에 부채질을 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

 

두 주먹을 세게 쥐고 입술 안 쪽을 이로 씹는다. 다물렸던 입새 사이에서 무언가 꾹꾹 눌러담은 듯한 목소리.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시다면 같이 깨어 계시든가 하시죠. 하르드 당신께서 두 눈 부릅뜨고 날밤을 새시든, 저 누추한 나무 아래 불편한 잠을 주무시든 ..."

 

그 소년이 지고 있었을 짐을 생각한다. 제 것임을 들키고 싶지 않아 소대의 꾸러미 안에 숨겨둔 것이 불찰이다. 아니, 그것이 있었다 한들 소용은 없었을 것이다. 무심코 아린 팔을 감싸안았다.

 

" ...... 대단한 말버릇이십니다. 그렇게 저를 다 탓하시면 기분이 좀 나아지십니까?"

 


 

갑자기 들끓듯 터져나온 적대감에 당황해 눈썹을 찡그린다. 그로서는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못 미더워서 깨어 있는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한다고 했을 텐데. 말버릇......"

 

항변을 이어나가려다가, 어처구니없이 무례한 단어선정에 말문이 턱 막힌다. 불을 가로막고 선 형상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빛이 들지 않아 검게만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순간순간 흔들린다. 테이아의 생각은 온전히 여기 있지 않아 보였다. 팔을 감싸안는 동작까지도 불안정하다.

 

"마음대로 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생각이지 않나."

 

하르드는 몸을 뒤로 기울여 나무에 등을 기대고 체온 유지를 위해 팔짱을 꼈다. 그리고 아직 감지 않은 눈꺼풀 아래로 테이아를 내려보았다. 용광로처럼 이글대던 불길이 멀어지자 어떤 마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것처럼 차갑게 우는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나는 길이 틀려도 상관없어."

 

하르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대화를 차단하듯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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